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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에도 한계가 있다: 착한 사람도 무뎌질 수밖에 없는 이유

by 소년의 뉴스 2025. 6. 12.

마음이 지친 시대, 공감이 무뎌지는 이유를 묻다
한때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마음 아파하는 것을 '인간다움'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뉴스에서는 연일 참혹한 사건들이 보도되고, SNS에는 피해자의 얼굴과 사연이 빠르게 소비된다. 처음엔 눈시울이 붉어지던 사람도, 시간이 지날수록 반응이 옅어진다. “또야?”, “이번엔 어디?”라는 식의 반응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누군가가 울고 있어도 ‘왜 저리 감정에 휘둘리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는 현상은 비단 일부 냉소적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가장 민감했던, 이른바 ‘착한 사람’들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의 벽을 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변화는 과연 개인의 도덕성 결핍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처한 환경이 공감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든 것일까? 현대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감정적 자원을 착취하는 시스템 위에 서 있다. 끊임없는 정보의 흐름, 반복되는 비극의 소식,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향한 ‘반응’을 요구하는 온라인 문화는 우리가 정서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만들어낸다. ‘공감 피로’라는 말이 더 이상 특정 직업군만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상적 증상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는 착한 사람도 왜 무뎌질 수밖에 없는지를 공감의 심리학적, 사회적, 신경학적 맥락에서 살펴본다. 우리는 공감이라는 능력이 무한정 지속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공감의 한계를 이해함으로써 오히려 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감정적 연결을 모색할 수 있다. 이제부터 다룰 세 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정서적 에너지는 고갈된다: '착한 사람'일수록 더 빨리 지치는 이유

반복되는 고통, 무뎌지는 감정: 감정적 탈감각화의 메커니즘

지속 가능한 공감을 위하여: 공감의 회복탄력성과 자기보호 전략

 

공감에도 한계가 있다: 착한 사람도 무뎌질 수밖에 없는 이유
공감에도 한계가 있다: 착한 사람도 무뎌질 수밖에 없는 이유

1. ‘착한 사람’의 딜레마: 무한히 주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들


사회는 ‘착한 사람’을 칭찬하고 이상화한다. 배려심이 깊고, 남의 감정을 잘 읽으며, 도와달라는 요청에 선뜻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변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런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갈등을 조율하고, 눈에 띄지 않게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며, 그 이면에는 상당한 정서적 소모가 있다. 특히 '착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겪는 정서적 피로는 외부에서 보기에 잘 드러나지 않기에, 이들이 소진될 때까지 주는 것을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압박으로 이어지곤 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착한 사람’은 높은 정서적 민감성을 가진 경우가 많다. 이는 곧, 타인의 감정 상태를 감지하고 이에 반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누군가 불편해 보이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하고, 갈등이 생기면 자신의 감정을 희생하면서까지 상황을 봉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두드러지며, 사회적으로는 미덕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정서적 자원을 급격히 소모시키는 요인이 된다.

정서적 에너지는 물리적인 에너지처럼 유한하다. 하루에도 여러 번 타인의 기분을 신경 쓰고, 불편한 감정을 감지해 그것을 중재하려 노력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짊어지는 일은 마치 자신의 배터리를 조금씩 남에게 나눠주는 것과 같다. 문제는 ‘착한 사람’일수록 이 배터리를 소중하게 관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충전하는 법조차 외면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이 피로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타인의 필요가 자신의 필요보다 앞선다는 신념 혹은 무의식적인 책임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착함'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좋은 사람', '배려 깊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일종의 역할이 되어버린다.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면 '실망스러운 사람'이 되거나, 때로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착한 사람을 스스로의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인다. 예를 들어, 친구가 힘들다고 말했을 때, 본인은 지쳐있어도 끝까지 들어주어야 한다는 압박감, 직장 동료가 도와달라 하면 본인의 업무가 밀리더라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외부에서 강요되지 않아도 내면화된 도덕적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하게 만들고, 지속적인 자기희생을 정당화하는 구조를 낳는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정서적 번아웃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특히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의 특성상, 이들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주변에 괜찮은 척을 하며 무리하게 감정을 감춘다. 그 결과는 감정적 무감각, 무기력, 냉소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연구에서는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감정 소진을 더 빠르게 경험하며, 이로 인해 일상의 즐거움이나 동기 자체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고했다. 특히 이들은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요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감정적 피로가 축적되어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많은 ‘착한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타인에게 헌신할까?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도덕적 규범이 큰 역할을 한다. 아이가 자주 “너는 착한 아이니까 참아야지”, “도와주는 게 예의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면, 착함은 자기 존재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때의 착함은 단순한 성격 특성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한 조건처럼 기능한다.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타인의 요구에 맞추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또한 현대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도 이러한 정서적 소진을 가속화한다. SNS와 메신저의 발달로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 문제 상황, 감정 기복에 실시간으로 노출된다. 착한 사람들은 이러한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때로는 온라인 상에서조차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고 위로해주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단지 댓글을 달거나 메시지를 보내는 수준일지라도, 감정을 주고받는 일은 정서적 비용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비용은 가시화되지 않기 때문에, 착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왜 이렇게 갑자기 무기력해졌지?'라며 스스로를 탓하거나 당황하게 된다.

결국, 착한 사람이 빨리 지치는 이유는 단순히 ‘남을 너무 많이 돕기 때문’이 아니다. 본인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 이미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사회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들은 타인을 돕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의미가 자신을 점점 고갈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깨닫는다.

따라서 우리는 ‘착한 사람’에게 위로와 감사를 전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정서적 한계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무한히 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어주려면, 스스로를 보호하고 충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의 배려가 아니라, 먼저 스스로가 허락해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정서적 소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착한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정서적 한계를 인정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착함을 포기하는 것과 자기 보호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이 둘이 충돌하지 않는다. 타인을 돕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건강하게 경계를 설정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지속적으로 타인을 지지할 수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지금은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나의 시간을 먼저 조율하고 남은 여유로 타인을 돕겠다는 결단은 이기심이 아니라 자기 존중의 태도이다.

정서적 자원의 소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경계’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감이 높을수록 감정적 경계가 흐려질 가능성이 큰데, 이는 타인의 감정을 마치 내 일처럼 흡수하게 만든다. 경계란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심리적 선이며, 이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되고, 타인의 분노는 나의 죄책감으로 바뀐다. 결국 타인의 감정을 돌보려다 나 자신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는 타인을 거절하기 위한 벽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며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한 토대다. 감정적 경계를 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기본은 ‘상대의 감정은 상대의 책임’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공감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을 대신 짊어질 필요는 없다.

더불어, ‘착한 사람’은 자주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감정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타인의 감정만을 우선시하는 삶은 결국 자아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기 인식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어떤 상황에서 유난히 피로했는지를 기록하고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일기, 감정 로그, 명상, 심리상담 등의 방법은 자기 인식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자기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지금 지쳤다’는 신호를 놓치지 않게 되고, 타인의 요청에 무조건 반응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다.

마지막으로, ‘착한 사람’이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들이 더 이상 ‘무한한 이해자’ 혹은 ‘언제나 도와주는 사람’으로만 기능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정서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피드백을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무심코 요구하는 “도와줘”, “너는 원래 잘하잖아”, “네가 해야 편해” 같은 말이 누군가의 소진을 가속화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착한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지금은 너를 먼저 챙겨도 돼”라고 말해주는 것이 더 큰 배려일 수 있다.

 

2. 타인의 감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들: 감정 노동자로서의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 쉽게 지치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감정 노동 때문이다. 감정 노동이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통제하거나 억제하면서 타인의 감정에 맞춰야 하는 정서적 수행을 말한다. 이 개념은 원래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사회적 관계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특히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타인의 정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착한 사람’일수록 감정 노동의 비공식적 수행자로 살아가며, 이는 결국 만성적인 정서 피로와 자기 상실을 초래한다.

이들은 타인의 얼굴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표정을 분석하고, 말투나 제스처에서 감정의 미세한 결을 포착해낸다. 누군가 말은 웃으며 하고 있어도 목소리의 떨림이나 눈빛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거기에 반응해 행동을 조정한다. 대화 중에 기분이 상한 기색이 보이면 그 감정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돌리거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억지로 웃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반복은 타인의 감정 곡선에 자신의 정서를 맞추는 일이 되며, 결국 자기 감정은 밀려나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이 감정 노동의 부담은 특히 인간관계가 많은 환경에서 더욱 심화된다. 학교, 직장, 가족 등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서 착한 사람은 ‘감정의 관리자’ 역할을 맡는다. 친구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직장에서 후배나 상사의 기분을 맞추고, 가족 내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데 중간자 역할을 자처한다. 이런 행동은 외부로 보기에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듯하지만, 당사자는 내면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있다. 게다가 이 감정 노동에는 보상도, 공식적인 인정도 없다. 도리어 “네가 있으니 다행이다” 같은 말이 의무감을 부추기고, “항상 잘하니까”라는 칭찬이 감정적으로 회피할 여지를 없애버리기도 한다.

또한 감정 노동은 겉보기와 달리 신체적·심리적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 감정의 억제는 뇌의 자율신경계에 지속적인 긴장을 유발하고, 코르티솔 등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장기적으로는 만성 피로, 두통, 위장장애, 불면 등의 신체 증상으로 연결되며, 심리적으로는 우울, 불안, 자기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감정 표현을 억누르고 위로하는 역할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우울하거나 무기력해졌을 때 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약해졌다고 느끼며 부정적인 자기 인식을 강화하게 된다.

이처럼 착한 사람은 관계 속에서 감정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문제는 이를 자각하지 못하거나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회는 착함을 도덕적인 덕목으로 찬양하면서, 그에 따르는 보이지 않는 비용에 대해 무관심하다. “사람 사이에는 배려가 있어야지”, “네가 먼저 이해해줘야지” 같은 말은 의도와는 다르게 감정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압박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감정적으로 둔감한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범하고, 감정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그걸 수습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불균형이 고착화된다. 이렇게 감정적 책임이 한쪽에만 몰릴 때, ‘착한 사람’은 결국 자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거나, 그것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정서적 방어기제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을 멈추기 위해선 감정 노동을 해온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나는 지금 타인의 감정을 대신 책임지고 있는가?”, “이 상황에서 정말 내가 감정까지 케어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같은 질문은 자신을 감정적 책임에서 분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감정 노동이 과도할 때는 작은 ‘감정적 휴식’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즉시 반응하지 않기,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관계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기, 의도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해 감정을 정리하는 등의 실천이 필요하다. 이는 무책임하거나 냉정한 태도가 아니라, 정서적 회복탄력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감정 노동을 줄이기 위한 또 다른 접근은, '좋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좋은 사람=항상 친절하고, 이해하며,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좋은 사람은 자신의 감정도 소중히 여기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감정의 균형을 이루려는 사람이다. 필요할 때는 “지금은 어렵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다른 이의 기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기분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배려를 실천할 수 있다.

이처럼 ‘착한 사람’이 감정 노동을 과도하게 수행하는 이유는 단순히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생존 전략과 관련이 깊다. 감정에 민감한 사람들 중 다수는, 가족 내에서 갈등을 피하고자 스스로 중재자가 되거나, 부모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방식을 배워왔다. 이른바 ‘좋은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이들은 “엄마가 속상하지 않게 해야 해”, “화내지 않도록 눈치를 보자” 같은 내면화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신보다는 타인의 정서 상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태도를 체화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정서적 민감성과 순응이 성장 후에도 지속된다는 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갈등을 회피하고, 누군가가 실망하거나 화를 낼까 두려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향이 된다. 그 결과, 개인은 자신이 감정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관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당연하게 떠맡는다. 더불어, ‘착해야 한다’는 강박은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고, 궁극적으로 자기 정체감에도 혼란을 준다. “나는 정말 이걸 원한 걸까?”, “이건 내 감정일까, 남의 감정에 반응한 것일까?”와 같은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정서적 피로는 단순한 ‘지침’을 넘어 정체성의 위기로 발전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미지가 너무 강하면, 자신의 분노, 짜증, 실망감 같은 감정은 그 자체로 죄책감의 원인이 된다. 감정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나쁜 거야”라고 판단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억압과 부정이 반복되고, 결국 자기 감정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이는 정서적 이중 고통을 유발한다. 즉, 남의 감정에 지나치게 반응해 지치고, 그로 인해 생긴 자신의 감정조차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감정 노동’이라는 용어를 일상 속에서 더 많이 활용하고,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언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감정 노동을 많이 해서 힘들어”라는 문장은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객관적으로 에너지 소모의 원인을 파악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시작점이 된다. 감정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 실질적인 심리적 자원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주변과 자신 모두 인식해야 한다. 이와 함께, “항상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내면의 규칙을 조금씩 유연하게 풀어가는 연습도 중요하다. 오늘 하루쯤은 누군가를 먼저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용, 감정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승인. 이런 작고 단단한 자기 돌봄의 언어가 ‘착한 사람’의 고갈을 막는 기초가 될 수 있다.

또한, 감정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군가의 감정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기본적인 자기 확신이다. 상대의 감정은 나의 행동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통제하거나 해결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태도는 차갑거나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과 타인 사이에 건강한 정서적 구분을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착한 사람’은 더 이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소진되는 감정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 감정과 타인의 감정 모두를 존중하는 성숙한 정서적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3. 자기 돌봄 없는 ‘배려’는 자기 소모일 뿐: 회복 탄력성을 지키는 법


정서적 에너지는 한정된 자원이다. 물리적 에너지가 잠이나 음식으로 보충되듯, 감정적으로도 우리는 회복과 충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착한 사람’일수록 이 단순한 원리를 외면한 채 살아간다. 그들은 타인의 감정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늘 친절하고 이해심 깊은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하루하루 감정 자원을 쏟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서적 고갈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무기력, 냉소, 자책, 감정의 무뎌짐이다.

이러한 상태는 단순한 피곤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서적 고갈은 심리적 소진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자기 정체성과 삶의 방향감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지치는 걸까?”,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 왜 고마워하지 않지?”, “이젠 아무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아” 같은 생각들이 마음에 자주 떠오른다면, 당신의 정서 에너지는 이미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 소진 상태를 자각하고 멈추기 전에, 착한 사람들은 종종 더 ‘착해지려는’ 방향으로 대응한다는 점이다. 더 많이 공감하고, 더 많이 배려하면 관계가 좋아지고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오히려 악순환을 만든다.

이쯤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경우, 착한 사람은 타인의 인정과 안정된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으려 한다. 즉, 배려는 단지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연관된 심리적 전략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가를 챙기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상대방이 실망하면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자기 돌봄보다 타인 배려가 우선되는 삶은 필연적으로 정서적 자기 소외로 이어진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자기 돌봄이다. 이는 단순히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 자기 내면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감정적 필요를 스스로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 어떤 감정을 가장 많이 느꼈는지 돌아보고, 그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주거나, 누군가의 감정에 반응하기 전에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감정 상태인가?”를 자문해보는 작은 습관이 중요하다. 감정은 억누를수록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인정할수록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또한 자기 돌봄은 경계를 세우는 데서 시작된다. ‘착한 사람’은 종종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누군가 힘들어 보이면 본능적으로 도와주려 한다. 그러나 모든 부탁에 응답할 필요는 없고, 모든 정서적 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단호한 경계 설정은 정서적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핵심이다. "지금은 도와줄 수 없어", "이 문제는 네가 스스로 해결해야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연습이 필요하다. 경계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의 균형을 위한 기본 장치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나를 지키는 방법을 익힐 때, 비로소 정서적 소진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자기 돌봄에는 정서적 표현도 포함된다. ‘착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불편함을 느껴도 참거나, 기분이 상해도 웃는 얼굴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 억압은 심리적 긴장을 높이고, 장기적으로는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허용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은 짜증이 나도 괜찮아”, “화가 나는 것도 나의 감정이야”라고 말하며,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때로는 일기 쓰기, 상담, 감정 일람표 감정 기록 등 구체적인 도구를 활용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정서적 회복탄력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 에너지를 어떻게 다루고, 언제 충전하고, 어디에서 한계를 그을지를 배울수록 회복탄력성은 강해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연민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피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내가 왜 이렇게 약하지?”, “나는 왜 잘 못 견디지?”라고 자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자기 연기를 멈추고 진짜 감정을 받아들이는 힘이다. “지금 힘든 건 당연해”, “나는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회복의 궤도에 올릴 수 있다.

결국, 지속 가능한 배려는 ‘내가 나를 먼저 돌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감정은 나눌수록 줄어들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베풀면 내 것이 사라진다. ‘착한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감정적으로 고갈되기보다는, 자기 감정에 민감하고 충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깊고 건강한 배려의 방식이다. 타인을 위한 따뜻함도, 자신을 위한 온기가 있을 때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그 균형을 찾는 일, 바로 그것이 정서적 회복의 시작점이다.

‘착한 사람’이라는 이름은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종종 침묵된 감정과 소모된 에너지가 숨어 있다. 타인을 향한 배려가 나를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그 친절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할 때다. "나는 정말 괜찮은가?" "나는 나를 돌보고 있는가?" 정서적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만큼, 나를 지키고 돌보는 선택도 따뜻한 용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