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나의 이야기 같았어” 감정이입이 깊었던 드라마나 영화 속 장면이 마치 자신의 기억처럼 떠오른 적이 있는가? 타인의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몰입한 경험이 어느 순간 자기 내러티브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이 현상은 단순한 몰입이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기억의 변조 현상과 관련된다. 이 글은 ‘감정 이입’이 어떻게 ‘기억 혼동’으로 이어지는지, 나아가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 구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한다.
1.공감은 어떻게 타인의 기억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가
<감정 이입의 뇌 메커니즘과 기억 유사화 현상>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는다. 친구의 연애 이야기, 다큐멘터리 속 전쟁 고아의 고통, 드라마 속 주인공의 이별 장면.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어떤 이야기들은 단순히 기억나는 것을 넘어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특히 몰입도가 높거나 정서적으로 강렬했던 장면일수록, 그것은 마치 과거에 실제로 내가 겪은 사건처럼 마음속에 새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타인의 경험에 강하게 감정 이입하며, 그 결과로 ‘기억의 주인’을 혼동하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간의 ‘공감’ 메커니즘과 ‘기억’ 체계의 상호작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공감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모방된 체험’이다
심리학적으로 ‘공감’은 감정 이입과 인지적 이해 두 가지 차원을 가진다. 감정적 공감은 타인의 기쁨이나 슬픔을 나의 감정처럼 느끼는 것이며,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해석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감정적 공감의 경우, 단순히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실제로 타인의 감정을 시뮬레이션하게 만든다.
신경과학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핵심 개념으로 거울신경세포 시스템을 제시한다. 이 세포는 타인의 행동을 관찰할 때, 마치 자신이 그 행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활성화된다. 예컨대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보면, 관찰자의 뇌도 고통과 관련된 신경 회로가 반응한다. 따라서 타인의 감정을 ‘본다’는 것은 실제로 그 감정을 ‘조금은 경험한다’는 의미와 가깝다. 이처럼 공감은 외부 자극을 내부 경험으로 모방하는 정서적 체험이며, 이는 곧 기억으로 저장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기억은 ‘재현’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많은 이들이 기억을 ‘사진처럼 저장된 과거’로 이해하지만, 인지심리학은 기억이 일종의 창조적 재구성 과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고, 당시의 감정, 맥락, 의미 해석을 기반으로 요약된 서사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회상할 때마다 조금씩 수정되고 덧붙여진다.
문제는 이 재구성의 틈에 타인의 이야기가 끼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공감적 몰입이 강했던 타인의 경험은 우리 뇌에 강한 감정적 흔적을 남기는데, 이러한 감정은 뇌에게는 “중요한 정보”로 간주되어 기억으로 저장되기 쉬운 조건을 갖춘다. 이후 뇌는 타인의 경험을 내 삶의 맥락 안에서 재해석하거나, 심지어는 내 경험처럼 재배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드라마 속 인물이 부모를 잃고 절망에 빠지는 장면에 깊이 공감했다면, 그 감정과 유사한 정서적 경험(예: 실제로는 반려동물을 잃었던 슬픔)이 뒤섞여, 몇 년 후에는 “어릴 때 나는 큰 상실을 겪었다”고 회상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상실’이 실제 사건보다 허구와 뒤섞인 감정적 내러티브일지라도, 기억 속에서는 진짜처럼 느껴질 수 있다.
-감정과 기억의 융합: 몰입의 심리학
감정이 강하게 작동하면, 인간의 주의는 날카로워지고 정보 저장 능력도 강화된다. 이것이 바로 플래시벌브 기억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9·11 테러, 세월호 참사처럼 감정 충격이 컸던 사건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메커니즘은 실제 경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드라마, 영화, 소설에 강하게 몰입할 때도 뇌는 현실과 유사한 방식으로 감정을 경험하며, 때로는 플래시벌브 기억처럼 인상 깊은 장면을 뚜렷하게 저장한다. 심지어 이는 향후의 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준다. 한 청소년이 트라우마를 다룬 영화에 깊이 몰입한 뒤, “나도 그런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전혀 드문 일이 아니다.
즉, 공감이라는 감정 통로를 통해 외부 서사가 감정적 경험으로 내부화되고, 그 감정은 다시 기억 구조에 흡수된다. 이 융합은 개인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지만, 동시에 ‘경험의 소유자’를 혼동하게 만든다.
-서사적 자아의 작동 방식
현대 심리학과 철학은 ‘자아’를 단순한 실체가 아닌 서사로 본다. 즉, 우리는 자신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를 만들고 수정해나가는 존재이며, 그 이야기는 기억과 감정, 가치관이 얽힌 복합적인 내러티브이다. 이 내러티브 속에 타인의 이야기나 감정이입된 장면이 ‘삽입’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의 삶을 내 정체성의 일부로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감정 이입은 단순한 감성적 반응을 넘어 정체성 구성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내가 아닌 인물의 고통을 내 서사 안에 넣고, 그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그것을 ‘극복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내 자아 서사의 일부가 된다. 비록 그 기억이 객관적으로는 허구일지라도, 심리적으로는 실제 삶의 한 장면처럼 기능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공감: 미디어는 어떻게 감정을 확장하는가
과거에는 공감이 주로 직접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작동했다면, 오늘날의 공감은 점점 더 간접적이고 매개된 경험을 통해 발생한다. 우리는 이제 텔레비전, 유튜브, 드라마, 팟캐스트, 게임, SNS 등을 통해 수없이 많은 타인의 삶을 마주하고, 그 속에 몰입한다. 특히 몰입형 서사 콘텐츠는 ‘내가 경험하지 않았지만 마치 겪은 것처럼 느끼는’ 공감 상태를 유도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넷플릭스의 감동 실화 기반 드라마, 유튜브의 고백형 브이로그, 또는 뉴스 속 고통받는 이들의 스토리 등은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닌 감정 전달을 목적으로 구성된다. 영상 편집, 배경 음악, 시점 선택, 나레이션 방식 등은 모두 감정 이입을 자극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감정이입이 일종의 습관화된 인지 반응이 되어, 무의식적으로도 타인의 정서 상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매개된 공감이 실제 경험에 버금갈 정도로 강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두고 "가상적 자기 동일시"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현실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나 사건을, 미디어 속 타인을 통해 대리적으로 경험하고 내면화한다. 이때 뇌는 허구와 현실을 철저히 구분하지 않는다. 감정 자극의 강도와 반복 빈도에 따라, 실제와 동일한 수준의 정서 반응과 기억 저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
-기억과 감정은 서사를 따라 흐른다
기억은 단순한 정보 저장 장치가 아니다. 인간의 기억은 기본적으로 서사 중심적이며, 의미 부여와 감정적 연결에 의해 구조화된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단순히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주는 의미, 맥락, 교훈, 그리고 거기서 느꼈던 감정을 함께 재현한다. 예를 들어 "나는 고3 때 힘들었어"라는 기억은 사실상 "나는 무기력했고, 내 자신을 믿기 어려웠으며, 하지만 결국은 버텨냈다"는 감정과 의미의 이야기다.
이 서사 기억은 자신의 실제 경험뿐 아니라,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타인의 경험에도 적용된다. 누군가의 트라우마, 극복 서사, 혹은 감정적으로 울림이 컸던 이야기들이 내 기억 속 ‘감정의 궤적’과 닮아있다면, 인간은 그것을 무의식 중에 자신의 내러티브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경험의 소유자가 누구였는지를 흐리게 만든다.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기억은 이미 공유되고, 그 사람의 삶 일부가 내 정체성에 통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와 언어가 공감을 기억으로 바꾸는 방식
여기서 문화적 요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자신을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동양 문화권에서는 관계 중심의 자아가 더 흔하다. 이는 공감이 정체성에 스며드는 방식에도 차이를 만든다. 한국인의 경우, 드라마나 이야기 속 인물의 감정을 자신과 쉽게 연결하고, 그 감정을 “우리”의 이야기로 포섭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경향은 ‘정’이나 ‘한’처럼 공동체적 정서 개념 속에서도 드러난다.
언어 또한 기억 형성과 공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언어적 단서가 기억 왜곡을 유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감정 이입 상황에서도 사용하는 언어나 서술 방식이 기억을 ‘주관화된 내러티브’로 포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장면은 마치 내가 겪은 일 같았어”라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기억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 인지적 장치가 될 수 있다. 뇌는 이 언어적 암시를 기억 강화의 실마리로 받아들이고, 이후 그 장면을 보다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든다.
-공감 기반 기억이 일으키는 심리적 효과
공감을 통해 형성된 타인의 기억이 내 기억처럼 작동할 때, 그것은 때로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트라우마를 직접 겪지 않았지만 타인의 극복 서사를 통해 심리적 회복력을 배우거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도덕적 감수성을 높이는 경험 등은 그 예다. 이런 경험은 정서적 학습으로 연결되어, 향후 나의 선택과 행동에도 실질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 과정이 과도하게 작동하거나 자각 없이 반복될 경우, 기억의 진위에 대한 혼동이나 정체성의 불균형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이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을 자신의 이야기처럼 확신하게 되거나, 타인의 서사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현실을 왜곡되게 인식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이는 특히 정체성이 유동적인 청소년기나, 트라우마 치유 과정 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감정 이입은 분명히 인간적인 능력이지만, 동시에 기억을 조작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 거리감 또한 필요하다.
-기억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궁극적으로 이 주제는 우리에게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진짜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만약 어떤 장면이, 어떤 감정이 너무도 진실하게 마음속에 새겨졌다면 설사 그것이 남의 이야기였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그러한 공감 기반의 기억이 나의 행동과 선택, 가치관을 형성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의 삶’이라고 해도 될까?
이 질문은 기억과 자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공감은 단지 감정적인 공명만이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아파하면서 그 사람의 삶을 일부 차용하여 자기화한다. 이 과정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회적 기억’을 통해 진화해온 존재임을 보여준다. 나와 남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서사를 감정이라는 통로로 연결하고 확장하는 것 —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한 방식인 것이다.
공감은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며, 동시에 기억을 조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나의 것으로 ‘체화’하고, 그 감정을 내 이야기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기억의 경계는 흐려지고, 현실과 허구, 나와 남의 구분은 무뎌지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유연함 덕분에 우리는 타인을 깊이 이해하고, 아직 겪지 않은 삶을 ‘미리 살아보며’ 성장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공감은 단순한 감정의 공유가 아니라, 기억과 자아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행위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빌려, 자신만의 서사를 더욱 풍부하게 쌓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그 서사는 때로, 드라마 속 주인공의 기억처럼, 지극히 진실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2. 기억은 왜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는가
<감정의 강도와 내러티브 구조가 기억에 미치는 왜곡 효과>
인간의 기억은 사진처럼 정지된 장면을 저장하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감정과 서사의 영향을 받아 계속해서 덧칠되는 유동적인 구성물에 가깝다. 우리는 자신이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기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 사건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어떤 맥락 안에서 해석되었는지에 따라 그 기억의 형태와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현실에서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감정적으로 깊이 이입된 이야기라면 우리 뇌는 그 허구를 때때로 ‘실제 기억’처럼 저장해버린다.
감정의 강도는 기억의 저장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한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공포, 슬픔, 기쁨처럼 강한 정서 반응이 동반된 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는 감정을 처리하는 편도체가 해마와 함께 작동해 기억을 강화하는 신경학적 구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감정의 강도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감동적인 영화의 결말이나, 눈물을 쏟게 만든 드라마의 한 장면은 현실에서 실제로 겪은 사건만큼이나 강력한 정서적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뇌는 그 흔적을 ‘중요한 정보’로 분류해 기억 속에 보관한다.
서사 또한 기억을 왜곡하는 데 깊은 역할을 한다. 인간은 단편적인 사실보다는 이야기, 즉 ‘앞뒤 맥락이 있는 흐름’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저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보가 일관된 인과관계로 연결될 때, 우리는 그 이야기를 훨씬 더 잘 기억할 수 있으며, 그 기억은 보다 오래 지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잘 구성된 소설,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의 내러티브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우리의 뇌 안에 하나의 실제적 경험처럼 자리 잡는다. 뇌는 이야기의 구조를 따라 감정을 연결하고, 감정은 다시 기억을 강화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서사가 진실이었던 것처럼 믿게 되는 ‘기억 동화’가 발생한다.
이런 혼동 현상은 다양한 실험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가장 유명한 연구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가짜 기억’ 실험이다. 그녀는 피험자들에게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마치 과거에 겪은 일처럼 설명한 후, 그들이 그 일을 실제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 번도 겪지 않은 일을 ‘마치 실제로 겪은 것처럼’ 세세하게 회상해냈다. 단순한 언어적 암시만으로도 기억은 조작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그것을 믿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감정적 공감이 덧붙는다면, 그 혼동의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디지털 시대는 이 혼동을 더욱 심화시킨다. SNS에서 본 타인의 사연, 유튜브에서 본 감정적인 고백 영상, 혹은 몰입해서 플레이한 비주얼 노블 게임 등이 모두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우리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 속 감정에 이입하고, 그 이입을 통해 자신 안의 기억과 감정을 덧칠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순간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더라?” 하고 생각할 때, 그것이 뉴스였는지 드라마였는지, 타인의 사연이었는지 나의 일이었는지조차 헷갈릴 수 있다. 이는 정보가 과잉된 사회 속에서 감정과 기억이 분리되지 않고 뒤섞이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물론 이러한 기억의 혼동은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다른 이의 고통을 마치 내 일처럼 기억함으로써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가능하게 하고, 직접 겪지 않은 고통에 대해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혼동이 반복되거나 지나칠 경우다.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고통을 느끼는 경우, 혹은 타인의 서사 속 상처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사례도 있다. 특히 정체성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기에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상처나 삶의 방향성을 자기 삶의 실제 기억처럼 착각하게 되는 일이 자주 보고된다.
기억은 고정된 데이터가 아닌, 매번 불러올 때마다 재해석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충분히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나의 기억처럼 작동할 수 있다. 뇌는 감정의 흔적과 이야기의 흐름을 기반으로 기억을 재구성하며, 현실과 허구의 출처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끔 “나는 왜 저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지?”라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어떤 장면을 떠올릴 때 실제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의 생생함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혼동의 중심에는 ‘감정’이 있다. 감정은 기억을 각인시키고, 감정은 현실을 믿게 만들며, 감정은 타인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전환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때때로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기억하고, 자신이 한 번도 겪지 않은 일을 마치 실제처럼 떠올리며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허구와 현실의 기억이 혼동되는 현상은 단순히 콘텐츠의 감정적 몰입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살펴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기억의 출처’를 명확히 기록하거나 추적하지 않는 인지적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출처 기억 오류’라고 한다. 출처 기억 오류란, 특정 기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혼동하거나 망각하는 인지적 왜곡 현상을 의미한다. 예컨대, 어떤 정보를 뉴스에서 봤는지, 친구가 말해줬는지, 아니면 내가 상상했는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오류는 특히 감정적으로 강한 자극이 동반되었을 때 더 자주 발생한다. 감정이 강할수록 그 장면이나 이야기는 더욱 강하게 각인되지만, 그만큼 출처 정보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장면이 감동적이었다”는 정서적 인상은 잘 기억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겪은 일인지 허구의 이야기인지에 대한 출처 정보는 잊어버린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특히 시각적 이미지나 서사적 구조가 강한 콘텐츠, 예컨대 드라마, 영화, 웹툰, 소설 등에서 두드러진다.
출처 오류와 함께 자주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현실 착각’이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가 현실 세계의 상식과 일치하거나 감정적으로 그럴듯해 보일수록,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특히 드라마나 영화가 일상생활과 유사한 대화 방식, 공간 구성, 인물의 감정 변화를 보여줄 때, 시청자는 그것을 허구가 아닌 ‘현실의 재현’으로 착각하기 쉬워진다. 이때 감정이입은 관찰자의 태도를 넘어, 그 내러티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심리적 감각을 만들어낸다.
현대 미디어 환경은 이 모든 작용을 더욱 강화한다. 예전에는 이야기가 종이책이나 극장에서의 단발적 소비로 제한되었다면, 지금은 연속적인 콘텐츠 소비와 알고리즘 기반 추천 시스템이 사용자의 감정과 관심을 계속해서 자극한다. 한 인물에 감정이입한 채로 그와 관련된 클립, 인터뷰, 팬 영상 등을 끊임없이 소비하다 보면, 그 인물이 허구라는 사실은 점차 흐려진다. 감정적 유대가 강화될수록,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이 있는 기억’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혼란이나 오해로 끝나지 않고, 실제 자아 감각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일부 연구에서는, 드라마나 소설 속 인물의 삶에 지나치게 몰입한 후,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인생 목표를 ‘그 서사에 맞춰 재해석’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이야기 기반 동일시’라고 불리며, 허구의 인물과 자신의 정체성을 연결 지음으로써 감정적 일관성과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심층 심리의 작용이다. 그러나 그 경계가 모호해질 경우, 자신이 실제로 겪은 사건과 그렇지 않은 허구 사이의 분별력이 약화되며, 과거 회상에서 혼란을 겪는 경우도 발생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외로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 나는 마치 고아처럼 느껴졌어”라고 말할 때, 그 감정은 사실이지만 ‘고아’라는 표현 자체는 종종 드라마 속 인물에서 차용된 상징일 수 있다. 이때 그 사람은 실제 상황보다는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고, 기억을 더 극적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이처럼 현실의 감정과 허구의 서사가 뒤섞이면서 기억은 점점 ‘사실’이 아닌 ‘내러티브화된 감정의 구조’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감정적 회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기 정체성의 형성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 ‘그 일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줬는가’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그 감정 기반의 기억은 점점 허구적 요소를 더 많이 포함하게 되고, 이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내러티브, 즉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허구의 감정은 기억 속에서 실제 경험처럼 남을 수 있으며, 이는 단순한 기억 오류가 아닌 인간의 감정과 서사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허구는 현실을 모방하지만, 우리 뇌는 그 모방과 원본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감정은 진위를 따지지 않고, 공감은 진실보다 강력하게 뇌를 설득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어느 순간의 기억이 정말 내 것이었는지”에 대해 흔들리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3.나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허구에 의해 재구성되는 자기서사
어느 날 문득, 내가 떠올리는 ‘나’라는 사람은 정말 나일까? 어릴 적 외로웠던 기억, 어떤 날 울었던 밤, 누군가와 했던 대화들이 모든 기억이 진짜 ‘내 경험’이 아니라, 어디선가 본 이야기의 조각들이었다면?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울고, 웹소설 속 캐릭터처럼 분노하며, 영화 속 인물처럼 스스로를 정의하려 했던 순간들이 실제 삶의 반영이 아니라 허구의 편집된 조각이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진짜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지 문학적인 수사가 아니다. 현대 심리학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즉 자기서사가 우리가 소비하는 이야기들 특히 감정적으로 깊이 몰입한 허구의 이야기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삶을 단순한 연대기적 사건들의 나열로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순간들을 감정적으로 재구성하고, 원인과 결과를 엮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 구조, 즉 자기서사는 곧 우리의 정체성의 뼈대가 된다.
그러나 이 자기서사가 온전히 현실의 경험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경우, 우리는 ‘이야기처럼 보이는’ 구도를 빌려와 자신의 삶을 해석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허구 속에서 가져온 감정과 구성이 내 삶의 서사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이는 단지 기억의 혼동을 넘어, 삶의 방식과 감정 반응의 패턴까지 변형시키는 힘을 갖는다. 결국 우리는 허구의 감정 구조를 통해 실제 감정을 배우고, 허구의 갈등 구조를 따라 현실의 문제를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서사의 허구적 구성은 특히 감정이입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더 깊이 작용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에게 마음이 너무 동했을 때, 우리는 단지 ‘공감했다’는 수준을 넘어, 그 인물의 상황을 자신의 것처럼 체험하기도 한다. 그 인물이 느꼈던 절망과 혼란, 회복과 성장의 이야기는, 어느덧 우리 기억 속에 ‘나도 그런 시간을 겪은 적 있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감정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닐지라도, 뇌는 그것을 정서적 흔적으로 받아들이고, 기억 회로 안에 저장해버린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삶을 특정한 이야기 틀 안에 가두는 경향도 갖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영원히 선택받지 못하는 조연’으로, 또 어떤 사람은 ‘운명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 역할에 걸맞은 행동과 감정 반응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 이는 마치 자신이 허구 속 캐릭터처럼 살아가도록 스스로를 연출하는 셈이다. 심리학자 댄 맥아담스는 이를 ‘삶의 서사화’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설명할 때 이야기 구조를 빌려오며, 그 구조는 타인에게서 차용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 타인을 드라마와 영화, 웹소설 속 허구 인물에서 끊임없이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현대 콘텐츠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넷플릭스의 자동 재생,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 틱톡의 짧고 강렬한 감정 자극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새로운 서사를 공급한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복수극, 누군가의 고백, 누군가의 상실과 구원을 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단순한 시간 때우기가 아닌, 우리의 감정적 경험이 된다. 그 감정이 깊을수록,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도 저랬어”라는 구조로 기억을 편집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조차도 그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각색하고 덧칠한다.
예컨대, 과거에 누군가와 다툰 경험이 시간이 지난 후, 특정 드라마에서 본 ‘이별 장면’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더 극적으로 기억되거나,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상실감이 후행적으로 덧입혀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기서사가 재편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야기 소비가 과도해지면 자기 삶의 중심조차 허구의 구조에 잠식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청소년기나 정체성이 아직 유동적인 시기의 사람들에게는 특히 위험할 수 있다. 그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아직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이야기 속 인물을 무의식적으로 모델링 하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일 거야” “나는 어릴 때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성격이야” 같은 내면의 진단들이, 실제 경험보다도 허구 서사에서 차용된 감정 구조일 수 있다. 마치 성장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자신에게 이유 있는 상처를 설정하고, 그 상처를 자신의 성격 설명에 끌어들이는 식이다. 이때 문제는 상처가 실제가 아니냐가 아니라, 그 상처를 구성한 방식이 허구에서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종종 현실에 적합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극적인 감정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꼭 부정적인 방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 속 인물을 통해 우리는 정서적으로 성장하고, 고통을 해석할 언어를 배우며, 희망을 상상하는 힘을 얻는다. 허구가 현실을 왜곡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허구의 감정 구조를 내 감정 구조에 끌어올 때, 그것이 ‘인식된 차용’인지 ‘무의식적 동일시’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 심지어 허구 인물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 존재지만, 그것이 내 삶의 지문처럼 각인되기 전에 잠시 멈춰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감정은 진짜 내 것인가?”, “이 서사는 정말 내 인생의 이야기인가?”라고.
나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결국 ‘기억’과 ‘정체성’의 경계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이해하고, 타인의 감정을 통해 내 감정을 키워왔던 우리는, 그만큼 타인의 서사와 쉽게 엉켜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정체성은 바로 그런 엉킴 속에서 생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 단지 이야기의 조각이 아니라, 내가 주체적으로 엮어낸 이야기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기억할 수 있지만, 그 기억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허구로부터 배울 수는 있지만, 허구 속에서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 결국 삶은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유일한 진짜 이야기여야 한다.
자기서사의 허구적 구성은 특히 현대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전통적인 허구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소셜 미디어 역시 하나의 ‘이야기 세계’로 기능하게 되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유튜브 브이로그, 틱톡의 짧은 영상들은 모두 실재하는 인물의 실제 삶을 담고 있음에도, 정서적 편집과 서사적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픽션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 누군가의 감정적인 고백을 듣고 울고, 누군가의 일상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며, 우리는 다시금 감정이입을 경험한다.
이러한 감정이입은 반복될수록 기억의 형태를 바꾼다. 특히 이입이 강한 개인은, 실재했던 자신의 삶과 소비된 이야기 속 감정경험 사이에서 명확한 경계를 세우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시기에 슬픈 드라마나 음악을 반복적으로 소비한 사람은, 그 시기에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보다도, 그 감정 상태 자체를 훨씬 뚜렷하게 기억하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기억은 사건 중심이 아니라 감정 중심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중심 기억은 그 감정을 유도한 콘텐츠의 구조에 따라 구성된다. 슬픔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였다면, 나 역시 내 삶의 클라이맥스를 ‘그 감정이 가장 강했던 순간’으로 회상할 것이다. 이때 기억은 더 이상 객관적인 과거가 아닌, 내면화된 이야기로 변형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감정적 기억의 확장’이라 부른다. 이는 단지 기억의 오류나 왜곡을 넘어서, 정체성의 구성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정체성은 단순히 현재의 자기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의 경험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유동적인 구조다. 그런데 그 해석이 허구의 이야기 구조에서 비롯되면, 나의 정체성은 현실보다는 허구적 이상에 가까운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진짜 나보다도 ‘그럴듯한 나’, ‘이야기 속에 어울리는 나’가 되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을 ‘늘 버림받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인식은 단 한 번의 실연이나 가족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지만, 해당 인물이 오랜 시간 동안 ‘버림받는 인물’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감정이입한 경험이 누적되었다면, 그의 자기서사는 그것을 중심축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현실에서 겪은 몇 가지 일화는 전체 이야기의 재료로 사용되고, 나머지 공백은 허구의 구조로 채워진다. 이때 기억은 단지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적으로 편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자기 인식은 점점 더 극적인 내러티브에 기반한 정체성으로 고착화된다.
이처럼 자기서사는 과거의 편집일 뿐 아니라, 미래의 설계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느끼는지에 따라 미래 행동을 달리 설계한다. 성장 서사를 믿는 사람은 실패를 일시적인 장면으로 인식하고 극복을 상상할 수 있는 반면, 비극적 서사에 익숙한 사람은 같은 실패를 종말적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서사 구조가 종종 자율적 선택이 아니라, 소비된 이야기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차용된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이 ‘재미있어서’, ‘감동적이라서’ 좋아했을 뿐인데, 어느덧 그것이 우리 삶의 문법이 되어 있다.
자기서사의 외부 차용은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한다. 바로 타자화된 자기 인식이다. 자신을 자신의 시점에서 인식하기보다, 제3자의 시점, 또는 관객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는 SNS 상에서의 삶의 연출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좋아요 수, 댓글 반응, 영상 조회수 등은 우리가 특정 장면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를 학습하게 만들고, 그에 따라 자기 삶의 연출 방식이 변형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기 인식 자체가 ‘보여지는 나’, 즉 ‘스토리 속 나’로 수렴된다. 이는 실존적 자기와 서사적 자기 사이의 괴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진짜 이런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은 내가 그렇다고 믿고 있고, 나도 이제 그런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은 정체성의 피로감과 고립감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 모든 흐름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사라는 도구는 인간이 삶을 의미 있게 구성하고, 혼란과 고통을 견디기 위한 심리적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허구의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을 해석할 언어를 제공하고, 감정을 명명하게 만들며, 상처를 맥락화할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심리치료의 여러 접근법들 예컨대 내러티브 테라피는 클라이언트가 자기 인생을 ‘새로운 이야기’로 재서술함으로써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핵심은 ‘누가 서사를 만드는가’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고, 그 안에 허구의 영향이 있더라도 그것을 의식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서사는 곧 회복의 언어가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서사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살아가고 싶을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픽션의 힘을 빌려 고난을 견디고, 용기를 얻으며, 변화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흡수한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은 인간의 놀라운 능력이지만, 그 감정이 내 기억을 만들고, 정체성을 설계하기 전에, 우리는 한 번쯤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서사를 살고 있는가?”
“이건 내 이야기야…였나?”
우리는 오늘도 눈물 흘리며 드라마를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웹툰 결말에 가슴을 쥐어뜯고, 감동적인 유튜브 브이로그에 “나도 저런 인생 살고 싶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내 첫사랑이 김태희였던 것 같고, 학창시절 내가 전학 온 전학생을 짝사랑했던 것 같고, 심지어 한때는 왕좌의 후계자였던 느낌마저 든다. 기억이 아니라 시청 기록이 나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인간은 원래 이야기를 먹고 자라는 동물이다. 다만 다음에 또 감정이입할 때는 살짝 이렇게만 중얼거려보자. “아 잠깐만, 이건 내 이야기 같은 남의 이야기야.” 그러면 기억은 좀 덜 헷갈리고, 자기 인생의 주연 자리는… 다행히 아직 비어 있다.